지난 1972년 충청북도 진천군 인근 2500여평 임야를 상속받은 박덕만(가명·67) 씨. 30년 전 고향을 떠나 서울 구로동에서 인쇄업을 하고 있던 그는 지난 4월 고향을 찾아 토지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엄연히 자기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등기부 등본에 엉뚱한 이름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 사연은 이랬다. 상속받을 당시 워낙 경제적 가치가 없는 땅이라서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벌써 30여년.
그러다가 올 초 가족모임에서 아버지 묘와 친척들 묘를 이 임야에다가 납골묘로 한꺼번에 모시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일단 등기부 등본을 확인해 둬야겠다는 마음으로 찾은 고향길이었다. 사실을 확인한 박 씨는 일단 백방으로 수소문해 봤다.
조상 땅 찾기 소송만 매년 5000건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상성북리 188번지 땅. 본디 묘 자리가 있었지만 6·25전쟁 이후 관리를 안해 무주부동산 공고를 거쳐 국가 소유로 넘어가 있다. 전체가 681평 4억원을 호가하는 땅으로 토지임야 조사부를 보면 지난 1911년 유기봉(가명)씨 이름으로 사정되어 있지만 아직 후손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
그랬더니 새로운 주인으로 등기가 된 사람은 다름 아닌 동네 주민 강만수(가명·55) 씨. 지난 2005년 ‘부동산 소유권이전 특별법’이 시행되는 기간 중 강 씨가 이 지역에서 10년 이상 거주한 보증인 3명을 내세워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해 버린 것이었다.
설마 하며 너무 오래 방치해 둔 게 화를 부른 셈. 일단 박 씨는 땅을 돌려받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5월 청주지방법원에 기존에 갖고 있던 전 등기와 본인 증명서류를 근거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청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르면 오는 11월경 나올 1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전문가들은 등기 이전의 고의성을 따져봐야 하겠지만 대체적으로 박 씨의 승소를 점치고 있다. 승소하면 시가 3억~4억원 정도하는 땅을 박 씨는 돌려받게 된다.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코앞이다. 오랜만에 가족 친지들이 모이면 그간 살아온 얘기며 덕담을 건넨다. 여기에는 돈 번 얘기들도 으레 포함되기 마련. 가족들이 만나서 하는 돈 이야깃거리 중에는 조상 땅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국내 정서상 조상 땅에 민감하다 보니 조상 땅 관련 소송도 굉장히 많다. 조상 땅 찾기 동호회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만 조상 땅 찾기 관련 소송이 2500여건에 이르고 있다.
전국적으로 따지면 5000건이 넘을 것이라는 게 동호회 측 분석. 조상 땅 찾기 단초는 역시 추석 등 가족모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선대 조상님의 땅이 ‘어디에 있었다더라’, ‘집터가 있었다더라’ 하는 얘기부터 출발한다.
지하철공사에 다니는 손성민(가명·37) 씨가 바로 그런 케이스. 명절 때마다 할머니와 친지들로부터 큰할아버지 땅이 화성군(지금의 화성시) 마도면에 있다는 소리를 꽤나 들었던 그.
1947년 갑작스레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아버지 나이가 고작 6세로 상속등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땅 소유권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 이런 사정에 손 씨가 땅을 찾아나선 것은 작더라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는 아버지 꿈을 이뤄드리고 싶어서였다.
그가 휴가를 내고 땅을 찾아 나선 것이 3년 전의 일. 손 씨는 화성시청에서 할아버지 제적등본을 확인하고 구 토지대장과 도면 등을 들고 다니며 본적지 주변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지기를 보름. 드디어 결과물을 얻었다. 할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는 땅 3필지를 발견한 것.
시 상대 소송으로 찾아낸 땅 3필지
하지만 2필지는 지난 1992년 부동산 소유권 이전 특별법에 의해 이미 타인 명의로 넘어간 상황. 물론 소송을 걸 수도 있었지만 소유자가 이미 사망한 상태로 욕심을 접었다. 하지만 1필지는 화성시에서 도로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
그는 바로 화성시를 상대로 ‘부당이익금 반환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2억7000만원 보상금을 탄 그는 평택에 농사지을 만한 땅과 집을 지어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드렸다.
청계천에서 공구상 직원으로 일하는 유재한(가명·43) 씨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인 것은 지난 2007년 추석. 그가 남양주시 진건면 산흥리를 떠난 지 딱 20년이 되던 해였다. 떠날 당시는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동네에서 취직할 곳이 마땅치 않아 선택한 서울행이었다.
소작농으로 살다가 1960년대 돌아가신 아버지가 농지개혁으로 토지를 받았으나 5차례 내야 할 토지대금을 3차례 낸 결과로 상속등기를 받지 못했던 그였다. 1남4녀 중 막내로, 출가한 누님들과 별개로 어렵게 살아온 그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것이 바로 나머지 2차례 토지대금 영수증. 1975년 진건면장에게 납부했다는 사실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더 확실한 증명을 위해 그가 찾은 곳은 국가기록원과 진건면 농지과. 과거 납부 사실증명 서류를 한 번 더 발급받았다. 증빙서류를 구비해 대한민국을 상대로 승소한 게 지난해 9월. 수십 년 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땅이 시가로 8억원을 호가하고 있다.
아버지 유품에서 발견한 토지대금 영수증
일제시대 당시 토지 소유자를 표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주도해 만든 토지임야 조사부 문서.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 있는 이 문서는 선대의 땅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주소 번지수를 입력해 열람하는 방법으로 땅 소유자명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상땅 찾기에 중요한 원인 문서로 활용되고 있다. |
조상 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바로 6·25전쟁과 일제강점기. 워낙 격동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특히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일부에서는 제대로 된 등기지적 공문서가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이런 경우 다시 등기회복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당시 문맹률도 높고 행정적 절차를 몰라 등한시해 등기로 확정되지 않은 토지가 엄청나게 많아진 것. 이런 경우 정부는 무주부동산 공고를 내고 등기 소유자를 찾아나선다.
하지만 수십 년간 등기 소유자가 없었던 땅에 간단한 관보게재로 소유자가 나타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 따라서 이런 과정을 거쳐 국유화되고 있는 땅도 상당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바로 이런 맹점을 노린 토지브로커들이 또 활개를 치고 있다.
무주부동산 공고나 토지임야 조사부를 전문적으로 뒤져 등기 소유자를 찾아 ‘땅을 찾으면 나눠먹자’는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 수십 년간 관세청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한 길상용(가명·70) 씨가 이런 예이다.
사연은 이랬다. 원효로에 땅을 소유했던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6·25 피난 당시. 여기저기 땅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레 혼란기에 사망하신 아버지께 모든 땅을 상속등기받지는 못했다.
특히 1947년 아버지가 사들인 강서구 가양동 땅은 더욱 그랬다. 지금은 강서 마곡지구가 들어서며 아파트가 즐비해지고 있는 지역.
이 땅에 대해서 까마득히 모르고 있던 길 씨가 사실을 알게된 건 올해 3월 그를 찾아온 토지브로커 때문. 아파트 개발을 맡은 SH공사가 3000평 규모의 땅에 대해 31억원의 ‘불확지 공탁’을 걸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1951년부터 이 땅 옆에서 3000평 규모로 농사를 짓던 공성일(가명·65) 씨가 매년 조금씩 농사터를 넓혀오며 지금껏 손을 뻗친 대지가 또 3000평이 됐던 것. 간단히 말해 공 씨가 길 씨의 땅에 농사를 지은 셈.
따라서 SH공사는 3000평만에 대해서만 보상하고 나머지는 공탁해 버렸다. 브로커를 만났지만 길 씨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변호사를 찾았다.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확인한 길 씨는 아버지 땅이 있을 만한 주소지를 찾아 구 대장과 구 등기를 모두 열람했다.
비용은 20만원 들었지만 그는 지금 땅 점유자를 상대로 철거소송을, 정부를 상대로 공탁금출금지위확인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무주공산 땅 노린 토지브로커 활개
하천이 범람해 농사를 짓지 못해 방치한 땅을 방조제가 만들어져 찾게 되는 케이스도 여럿 있다. 1911년 조선총독부 당시 증조부가 토지 사정(본인 땅 확인)을 받은 홍종구(가명·50) 씨도 같은 경우다.
지금의 금호동에 땅을 갖고 있던 증조부였지만 땅이 중랑천과 한강의 합류지점이었던 것.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돼 있던 이곳에 제방이 축조된 것은 1970년.
토지임야 조사부를 비롯, 행정청 지적도, 증조부 제적등보, 홍 씨 호적등본 등을 원인 서류로 정부 상대 소송에서 홍 씨가 이달 초 승소했다.
한 달 안에 정부가 항소하지 않으면 4억5000만원 보상금을 그는 받게 된다.
김성배 기자 sbkim@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