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경술국치(한일합방) 때 '대사령'을 단행했다. 요즘으로 치면 '대사면복권'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대사령'을 단행했지만 의병장들은 풀어주지 않았다. '경술국치 대사령'을 일제가 발표한 대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또 의병장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공훈기록이 정확하지 않은 사례들이 많다. 우리 정부는 1960년대 초 대규모 독립운동가들에게 훈장을 주면서 공훈록을 남겼지만, 조선총독부가 남긴 <관보> 등 자료는 참고하지 않았다. 이에 정확하지 않은 기록들이 더러 나오고 있다. 참여정부 때부터 시작된 '조선총독부 관보 활용 시스템' 덕분에 잘못 알려진 독립운동가의 기록들이 바로 잡히는 사례가 있다.
의병 연구를 오랫동안 해 온 이태룡 문학박사(거제 옥포고 교사, 국어)가 '경술국치 대사령'의 실체를 따져본 글을 보내왔다. 그는 <의병 찾아가는 길> 1, 2권과 <국사봉에서 바라본 호남의병>,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1~4권 등을 펴냈으며, <의병찾아가는 길>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선정한 '우리 민족에게 유익한 책' 19권 중 하나에 포함되기도 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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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직후였던 1910년 9월 5일, 이른바 '대사령(大赦令)'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칙령 325호'로 발표된 95개조에 의해 면소(免訴), 불기소(不起訴),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난 자는 348명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면소자 11명, 불기소 처분자 11명,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난 자 326명이었다. 면소자는 내란범 2명을 제외하면 비도덕적인 범죄자이거나 폭행범 등이고, 불기소 처분을 받은 자도 대부분 비도덕적인 범죄자이거나 장례 규정을 어긴 자였다.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난 자는 과거 의병투쟁을 했던 자 168명, 의병 추정자 48명, 나머지는 잡범 132명이었다. 의병투쟁을 벌였던 자도 대부분 이른바 '폭도(暴徒)'(의병)이거나 몇몇 '소수괴(小首魁)'(소규모 의병대를 이끌었던 의병장)에 불과했고, 사형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던 의병장이나 소송 중에 있던 비중 있던 의병장은 제외되어 있었다.
일제가 겉으로는 98개조로 된 칙령 325호의 대사령을 발표하여 마치 경술국치 때 대사면을 한 것처럼 떠벌였으나 실제로는 사소한 범죄자나 과거 의병 활동자 중 자수한 자들을 중심으로 사면을 했던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31호(1910년 10월 4일)에는 대사령에 의한 전체 사면자의 규모가 드러나 있다.
"본년 칙령 제325호 대사령에 의하여 지난 30일까지 사면의 수속을 마친 인원은 조선총독부 관보 제7호와 제8호와 제9호에 소재(所載)한 348명 외에 1334명이니, 합계 1692(1,682의 오기-필자 주)명이라."
하지만, 경술국치 직후부터 이듬해 12월 31일까지 의병이나 의병장, 애국지사, 그리고 의병 추정자들의 사형 집행은 계속되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이하 관보)에 실린 사형 집행자는 모두 111명인데, 유력한 의병장은 11명,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의병장 8명, 의병장급 의병이 11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애국지사 1명, 의병이나 의병 추정자는 66명이며, 관보의 내용만으로 행적이 불분명한 자는 14명에 불과하다.
유력한 의병장으로는 심남일, 강무경, 김상태, 정경태, 오성술, 장인초, 신대룡, 최성천, 한명만, 윤국범, 전성범 등이고, 소규모 의병 부대를 이끌었던 의병장으로는 이세창, 김영택, 박화준, 김두수, 김상윤, 이병호, 최학준, 김병주 등이다. 의병장급 의병으로는 윤흥곤, 김일원, 김화서, 김수동, 김응백, 김학준, 정홍준, 정춘서, 김언세, 함재실, 박복인 등이다. 애국지사로는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재명 의사이다.
특히 관보 4호(1910.9.1)에는 호남 최대 의병을 이끌었던 전해산(全海山 : 본명 垂鏞) 의병장(대통령장)의 사형 집행 내용이 실려 있다.
경술국치 때 대사령에 의하여 모든 의병장이 사면 혜택을 받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호남 최고 의병장이었던 전해산 의병장도 며칠만 늦게 재판을 받게 되었더라면, 설령 사형선고를 받았더라도 풀려났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제는 공적이 현저한 의병장이나 애국지사에 대한 체포와 함께 중형(사형, 무기징역, 징역 15년 등)으로 다스렸고, 이미 재판 중에 있거나 대사령 이후에 붙잡힌 의병장들은 대사령에 관계없이 처형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 있다.
한편, 과거 의병투쟁을 벌였다가 투옥된 바 있던 의병장 또는 의병들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들 중에서 반성하는 빛이 뚜렷한 자에게는 가출옥(假出獄)의 은전을 베풀었던 내용도 관보에 실려 있다.
지금까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한 의병장이나 의병들의 유족들은 재판 기록만으로 순국일자를 추정했고,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도 최종 판결일을 바탕으로 순국 사실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순국 의병장 후손들조차 제삿날을 잘 몰라서 사형선고를 받은 날을 순국일로 잡고 제사를 지내오고 있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순국과 관련된 신문기사가 나온 날을 순국일로 잡은 경우도 허다했다.
강무경 의병장의 경우, 독립운동사 공훈록(국가보훈처)에는 재판 과정과 순국일을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은 채 두루뭉수리하게 끝맺고 있다.
(전략) 강무경은 심남일과 거취를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병 치료차 이전의 격전지였던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생활을 하던 중 적병에게 발각되어 8월 26일 함께 체포되어 9월 2일 광주로 이송되었다가 12월 15일 대구 감옥소로 이감되었다. 이곳에는 의병장 박영근(朴永根), 오성술(吳成述), 전해산(全海山 一名 垂鏞)도 수감되어 있었다. 결국 이곳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 1986. 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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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관보에는 강무경(姜武景 : 일명 尹秀, 鉉秀) 의병장은 심남일(沈南一 : 본명 守澤), 장인초(張仁初) 의병장과 함께 1910년 9월 30일 순국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사형집행. 심수택(沈守澤)과 강윤수(姜尹秀)는 모살범(謀殺犯)에 인(因)하야 본년 6월 3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의 선고를 수(受)하고 10월 4일에, 장인초(張仁初)는 강도(强盜)와 모살범에 인(因)하야 동년 9월 15일에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사형의 선고를 수(受)하야 9월 30일에 집행한 바가 되니라. <관보 제46호. 메이지 43년(1910) 10월 22일. 휘보(彙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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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의 경우,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형량과 판결 내용 및 순국일마저 잘못 기재되어 있다.
(전략) 그는 국내 순흥 남목리(順興 南木里)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그는 감금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순사의 칼을 빼앗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적의 손에 욕보느니 차라리 자처하겠다"라는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하였다. 일인들은 기계로 그의 입을 열어 먹이고자 하였으나, 단식 13일째인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 1986. 533쪽>
그러나, 관보에는 다음과 같이 대구감옥에서 순국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사형집행. 충청북도 영춘군 내면 남천동 김상태(金尙台)는 강도와 강도와주범(强盜窩主犯)에 인하야 본년 8월 31일에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사형의 선고를 수(受)하야 본월 21일에 대구감옥에서 집행한 바가 되니라. <관보 제326호. 메이지 44년(1911) 9월 27일. 휘보(彙報)>
지난 참여정부 때부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했던 관보(1910~1945)를 DB 시스템으로 구축하여 역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해 왔다. 2007년에는 1910년~1915년, 1937년~1945년을, 지난해에는 1928년~1936년 분량을 구축했고, 올해는 12년(1916년~1927년) 분량을 DB 시스템을 완료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할 때 대사령을 내려 수많은 의병과 의병장들이 사면된 줄로만 알았던 잘못을 바로잡고, 대사령을 실체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판결문과 함께 관보가 DB 시스템으로 완전히 구축된다면 한말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들의 삶을 보다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기에 만시지탄이나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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